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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문화] 그 맥을 잇는 사람들 (2) 징 -경남신문
등록일: 2006-01-21
[토종문화] 그 맥을 잇는 사람들 (2) 징 -경남신문 거창 '오부자 공방' 징장 이용구씨 쇠의 소리 깨워 천지를 흔든다 60여년이 훌쩍 넘었다. 한쪽 귀가 먹은 지는 벌써 오래됐다. 이젠 보청기도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래도 후회는 없다. 손끝을 따라 전해오는 가느다란 떨림에 환희를 느꼈다. 가슴 밑바닥을 적시는 울림을 찾아낼 때면 세상이 다 내 것이었다. 거창군 거창읍 정장리에서 오부자 공방을 운영하는 징장 이용구(71·경남도 무형문화재 14호)씨. 그는 징소리만 들어도 징의 좋고 나쁨을 바로 알 수 있다. 평생을 징과 함께 살아왔기 때문이리라. ‘징한 인연’. 그는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표현했다. #심부름꾼으로 맺은 인연 그가 징과 처음 만났을 때 느낌은 막연한 설렘같은 감상이 아니었다. 고된 허드렛일이었고 살기위한 방편이었다. 소학교 1학년을 중퇴한 8살 때다. 아버지가 갑작스레 돌아가셨다. 흉년과 가난으로 살기가 어려워지자 어머니는 자식들을 데리고 재가를 했다. “어머니 재가로 밥걱정은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형편은 못됐습니다. 뭐라도 해야 했죠.” 당시 그가 나고 자란 함양에는 징점이 아주 번성했다. 마침 어머니와 함께 들어간 집의 의붓삼촌이 김천의 한 징점으로 일을 다녔는데 일을 도우면서 같이 다니게 됐다. 징점의 잔심부름은 물론 소꼴 베는 일. 부엌 설거지까지 머슴 같은 생활을 했다. 그렇게 10여년 보냈다. “시간이 지나자 어느 순간 징소리가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모두가 잠든 새벽이면 몰래 밖에 나와 징만드는 일을 흉내내곤 했어요.” #스승을 만나다 의붓삼촌에게는 성씨가 다른 아들이 하나 있었다. 그는 김천으로 삼촌을 따라 징점에 일을 도우다 본격적으로 스스로 공부해 20대 후반에 징 작업의 최고 기술자인 대정이가 됐다. 바로 함양징의 큰 맥을 이룬 오덕수(89년작고)씨다. “그의 밑에서 징 만드는 일을 곁눈질하면서 징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어요. 한날은 날 부르더니만 징일을 배워보라고 하는 게 아니겠어요. 기회가 왔구나 싶었습니다.” 그날로 당장 징 일꾼들 옆에 끼어 앉아 본격적으로 일을 배웠다. 처음엔 쇠를 달구기 위해 화덕의 불을 지피는 풀무질부터 시작해 징 작업기술의 서열을 나타내는 센매. 전메. 앞메의 순으로 일을 배워나갔다. “정말 신이 났었죠. 잠까지 줄여가며 일을 했으니까요. 하루는 몸이 고단했는지 코피가 검정고무신에 질퍽거릴 정도로 흘렀는데도 모르고 망치질을 했습니다.” 그렇게 징에 대해 정열을 바쳐가며 결국 오덕수씨가 운영하는 징점중 하나를 맡아 대정이 일을 하게 됐다. 이후 서른두 살이 되던 해에 스승으로부터 독립해 함양의 안의에 징점을 열었다. #인생 굴곡은 있는 법 밤을 새워 쇠의 소리를 깨우고 징 소리에 취했지만 현실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징만 만져서 그럴까. ‘징’한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70년대 들어 새마을 운동이 추진되면서 우리 전통과 놀이문화는 소비향락적인 것으로 치부됐다. 덩달아 징 사업도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농악 등은 그 당시 사치였죠. 경제개발이 우선이었습니다. 당시 이런 공방이 50여개가 있었는데 74년도엔 결국 모두 문을 닫아버렸죠.” 이후 서울에 올라갔다. 답십리 영화 촬영소 앞에서 조그만 하꼬방(점포)을 냈다. 이것도 신통치 않았다. 어느 날 서울에서 양푼 공장을 하는 분이 찾아왔다. “그 사장님이랑 같이 일하다 그 터에서 독립을 했죠. 하지만 사람들이 제물건만 사가니까 결국 나가라고 하더군요.” 이후론 막노동판을 전전했다. 뻥튀기도 했다. 그러기를 3년. 서울 수색에 징과 유기를 만드는 공방을 냈다. 축사에서 잠을 잘 정도로 열심히 일한 덕분인지 장사가 잘 됐다. 그러나 땅주인이 1년에 2~3번씩 세를 계속 올려 어쩔 수 없이 이곳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최고의 경지 ‘징장’ 결국 86년 고향에 다시 돌아왔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결국 지금의 ‘오부자 공방’을 거창에 차렸다. 이때부터 징과 평생을 함께 할 것을결심했다. 이런 결심 때문일까. 88년 이후 전승공예대전에서 3회 연속 수상을 했다. 91년에는 이어령 당시 문화부장관의 특별 지시로 ‘한국표준 징소리찾기사업’이 추진되면서 그가 만든 ‘방짜징’이 우리나라 최우수 징으로 선정됐다. 방짜징은 국립국악원에 소장돼 있기도 하다. 93년에는 경남도 무형문화재 제14호 ‘징장’으로 지정돼 최고 장인의 경지에 올랐다. “한강 이남에서 징만드는 건 내가 최고라고 칭찬해 주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럴 땐 솔직히 굉장한 보람을 느낍니다.” 그는 현재 공방의 일선에서 은퇴했다. 현재 그의 맥은 아들 4형제가 이어가고 있다. 그래서 그가 운영하는 공방도 오부자(五父子)공방이다.현재 오부자 공방은 이용구씨와 함께 넷째 아들인 경동(41)씨. 며느리 김순영(36)씨가 운영한다. 첫째 아들점식(49)씨와 셋째 아들 성술(44)씨는 거창읍에서 북과 장구를 전문적으로 제작하고 있고 둘째 아들인 점술(47)씨는 서울에서 ‘오부자상사’를 열어 전통악기를 전국에 보급하고 있다. #바람의 소리, 하늘의 소리 그렇다고 아예 징에서 손을 뗀 건 아니다. 특별주문이 들어오면 손수 작업에 나선다. 국내 유명 사물놀이패 수장인 김덕수씨도 그에게 징이나 꽹과리를 꼭 주문한다. 유명 사찰 등에서도 특별주문이 들어온다. 징 하나에 보통 200만원 이상의 고가다. 특별한 주문이 올때마다 그는 한달간 꼬박 공방에 들어가 작품을 완성해낸다. 그는 징의 울림소리를 ‘바람의 소리. 하늘의 소리’라고 한다. 끊어질 듯 이어지며 긴 여운을 남기고 사라지는 나지막한 울림. 둔중한 쇠를 때릴 때마다 달라지는 깊은 소리는 사념을 떨쳐버리는 신성(神聲)이다. “무악에서 징은 인간의 소리를 하늘에 전하는 중요한 구실을 합니다. 그래서 하늘의 소리라고 한답니다. 좋은 징소리는 바람을 타고 십리를 넘는다고 해 바람의 소리라고도 하죠. 진정한 그 소리를 잡아내는 게 남은 소원입니다.” 투박한 쇠에 부드럽고도 웅장한 울음을 불어 넣고 마침내 생명을 품은 징으로 탄생시키는 그의 모습이 ‘하늘과 바람’을 무척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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